삶의 방식 VOL 2
원고를 넘기자마자 핸드백을 집었다. 초고를 작성하는 동안 참조했던 자료들이 책상 한켠, 모니터 건너에 어수선히 흐트러져 있었다. 되었다. 내일 치우자. 신고 있던 슬리퍼를 책상 밑으로 대충 벗어 던지고 굽낮은 구두로 가라 신었다. 서둘러 나가려는 나에게 편집장이 ‘퇴고는?’ 이라며 묻자 '내일요‘라고 가볍게 흘렸다.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마감까지는 한참이 남았고 원고는 초안이라기 보단 기안에 가깝다. 서두르는 나의 모습을 보며 선배 한명이 짓궂은 미소를 보냈다. ’데이트냐?‘ 나는 헤죽 웃어보였다. ’내일 회의 때 뵈요. 오늘은 먼저 실례하겠습니다아‘ 말꼬리를 가볍게 올리며 너저분한 사무실을 가로질러 나갔다. 긍정도 부정도 없는 대답이었다.
‘데이트’라는 단어의 의미가 이성을 만나 느긋하게 침묵을 즐기며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모니터가 아닌 극장 스크린 앞에서 영화를 보는 행위라면 분명히 나는 데이트를 하러 가는 것일 것이다.
그가 ‘연극 보자!’라말하며 부산을 떨면 나는 별다른 토씨 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이곤 했었고, 내가 지나가는 말에 ‘이번에 개봉한 영화가 보고싶어’ 라고 하면 그는 예매페이지를 열고 ‘뭐 볼까?’라고 되묻곤 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스킨쉽을 나누며 애정을 나누는 행각이 데이트라고 한다면 그나 나는 단호히 ‘No!!'라고 대답을 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를 사랑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방식하고는 꽤나 틀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의지하고는 있지만 그것과 사랑은 별개. 서로 제법 비슷한 인성을 가지고 있었고, 조금은 틀린 자부심과 자존심을 존경했다. 만나게 되면 코드가 맞았고 대화가 통했으며 시간이 즐겁게 흘렀다. 그렇기에 그와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그가 한국을 떠나던 2년 전까지.
그와 만나기 한 커피숍.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놓고 그를 기다렸다. 약속시간까지는 앞으로 대략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항상 정한 시간보다 10분은 일찍 나오는 그의 습관으로 볼 때, 그와의 만남은 한 시간이 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커피숍에 들어온 그를 향해 손흔드는 나를 보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렇게 갑작스런 작별을 고한 그날까지 그는 단 한번도 나를 기다리게 한 적이 없었다.
조금은 진하게 나온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지난 년도의 다이어리를 뒤적거렸다. 그가 귀국했다는 연락을 받고 서랍장 구석에서 발굴해낸 나의 작은 보물들. 짧게 쓴 메모. 장난 스럽게 끄적인 낙서. 꾸겨진 포스잇을 조심스럽게 피면 미소도 절로 걸렸다. 이 안에 추억이 있다. 여러 가지 기억의 편린들. 그리고 그 중에는 그와의 것도 있다.
스륵스륵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그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다. 지난 기억속의 그의 모습이 직소퍼즐마냥 맞춰져 갔다. 또랑또랑한 눈망울에 소년같은 미소. 우악스러운 손으로 거친 일은 도맡아 하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천하에 둘도 없는 게으름뱅이가 되던 그였다. 눈동자가 항상 슬퍼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를 보면 마치 눈물을 참는 아이처럼 느끼기도 하였다. 실제로도 굉장한 울보여서 슬픈 영화관람 후에 나온 그의 눈은 빨갛게 충혈 되어있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것을 생각하니 다시금 웃음이 나왔다. 생각보다 웃음소리가 크게 나왔는지 사람들의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를 기디라는 시간이 이리도 즐거울 줄이야!! 만일 이런 기분인 줄 진즉 알았다면, 먼저 나와 기다리는 것은 그가 아니 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웃었다. 한참을 깔깔 거리고 있는데 이마를 톡톡 치며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 뭐해? ”
퉁명스러운 말투다.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2년만의 그는 2년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렇게 내앞에 서 있었다. 설렁 입은 셔츠에 물빠진 청바지. 그렇게 편안했던 모습으로 그렇게 서있었다. 하도 웃었더니 눈물이 맺혔다. 맺힌 눈물을 스윽 흠치며 시계를 보았다. 역시나 약속시간 10분 전이었다.
“그냥. 사는게 재미있어서.”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반겼다.
티타임은 짧았다. 홍차를 시키려는 그를 막아서며 ‘한잔 하자’ 라고 말했다.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는 애주가였고 나는 소주 한병에 벌벌 떠는 약체였으니. 술자리의 발랄함과 열기는 사랑했으나 도무지 소주의 쓰디쓴 맛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끔 그의 조름에 마지못해 술자리를 가졌을 때도 술은 거진 그의 몫이었다. 나는 그가 목젖을 넘실거리며 술을 들이키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었다. 이런 그와 나 사이였으니 먼저 술 마시자는 이야기를 꺼낸 내가 어색했을지도 모른다.
“먼저 술먹자는 이야기도 꺼내고 변했네, 너?”
호프에서 500자리를 들이키며 그가 말했다. 변한 것은 그 또한 매한가지인 것 같았다. 주머니가 두둑하건 얄팍한거 취하기 위해 소주를 마시던 그였다. 맥주는 음료수라고 말하던 그였다. 내가 술을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점은 타협하지 못하던 그였다. 그가 내가 변했다 말하는 말투는 가볍고 즐거워보였으나, 그런 그를 보는 내 마음은 무겁고 쓸쓸했다. 겨우 2년이 지났을 뿐인데, 내가 모르는 그의 부분들이 늘어났다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잘 마시지 못하는 소주를 시켰다. 그의 눈이 다시금 동그래졌다. 오늘로 두 번째. 그런 그의 표정을 보니 갑자기 유쾌해져서 첫잔과 둘째 잔을 단숨에 비웠다가 잔을 압수당했다. 게슴츠름하게 뜬 눈으로 그는 소주잔과 맥주잔을 번갈아 들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흡입력이 있었고 즐거웠다. 그의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며 깔깔거리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넘실 흘러갔고 술잔 또한 넘실 들어갔다. 그는 빼앗아 갔던 소주잔을 돌려주는 대신 맥주 500잔을 쥐어줬고 나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맥주를 마셨다. 그의 앞에서 취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건 하나의 규칙이었다. 정하진 않았지만 늘상 지켜지는 약속. 그가 10분 먼저 나와 나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는 취해도 괜찮았지만 나는 취하지 않고 그를 지켜봐 주는 것. 이것 또한 그와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순간까지 지켜졌던 규칙이었다.
그는 늘상 취할 장소를 찾아 해메였던 것 같았다. 그는 항상 목말라 했고, 술을 마신다는 것은 도피를 위한 한가지 방법이었을 것이다. 술을 사랑하긴 하였으되 특별히 잘 마시는 편은 아닌지라, 술과 감정에 취하는 경우를 자주 봤다. 그는 거기다가 지독하게 앉은뱅이 술꾼이었다.
보통 막걸리를 앉은뱅이 술이라 불렀다. 앉은자리에서는 한 대접 두 대접을 마셔도 취하는줄을 모른다. 그렇기에 달달한 편인 막걸리는 노소를 불문하고 잘 넘기는 편이었고 그렇게 앉아서 즐긴 막걸리는 일어서는 순간 취기가 화악 올라오기 마련이었다. 앉아선 노래하고 웃고 떠들고 즐거웠던 사람이 일어나는 순간 위아래도 왼쪽과 오른쪽도 구별 못하는 주정뱅이가 된다. 그래서 앉은뱅이 술이라 불렀다. 그런데 굳이 막걸리가 아닐지어도 앉은 자리에서는 말짱하다가 일어나는 순간 급 취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그런 부류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와의 지난 만남도 그랬었던 것 같았다. 침울했던 나와 별개로 침울했던 그. 그날은 나또한 볼이 빨갛게 상기될 정도로 취해있었고, 그도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엔 목소리가 지나치게 커져버린 상태였다.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하고 집근처 역까지 바래다 준 그는 손을 흔들며 플랫폼을 떠나는 나에게 몇 번이고 무언가를 말을 하였고. 이내 피식 웃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보이며 안녕을 고했다. 잠시 떠났다 와야겠다고. 무언가 확신을 가지면. 아니면 무언가 변화를 이루면 돌아오겠다고 했다. 마냥 즉흥적인 것은 아니라고. 제법 깊게 생각하고 있던 것인데, 이제야 실천에 옮기는 거라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다. 아니 술로 지워버렸던 기억이었을까. 조금씩 달아오르는 뇌는 그 때의 일을 점차 뚜렷하게 기억해 내버렸다.
“그 때 뭐라 말 하려고 했던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다고 했으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나보다. 나는 일부러 취한척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았다. 그 또한 조금 취한듯? ‘어떤거?’라고 되묻는데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하였다. 지난 만남의 이야기. 이야기를 하면서 나의 기억은 더욱 새록해졌고, 그 또한 그 때의 기억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듯 싶었다. 실상 그는 기억력이 좋은편 이었으니 사소한 일일지라도 기억해 냈을지 몰랐지만, 그래도 조금 기뻤다.
“뭐라고 말할려고 했더라아- ”
그가 기지개를 피며 말꼬리를 늘렸다. 입술이 헤벌쭉 뒤집였다. 안다는 눈치다. 아니 저건은 분명히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쾅!! 그를 흘겨보면서 테이블을 쳤다. 살짝 친다는게 제법 큰소리를 내었지만 지지 않고 그를 흘겨보았다. 그래도 그는 헤실헤실. 표정을 풀지 않았다.
“지난간 이야기이고, 별 대단한 이야긴 아닌데...”
그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딛고 턱을 괴었다. 속인 고개가 내게 다가왔다. 지난번의 그 때처럼, 그의 투박한 손이 내 머리를 헝클으며 쓰다듬었다. 사실,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그리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어린애 취급한다는 느낌에 발끈하곤 했었는데, 기분이 좋았다.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주 마주하던 눈동자가 다가왔다. 슬퍼보이는 눈동자. 왠지 지금 이 순간에도 슬퍼 보인다는 것이 새삼 가슴이 아팠다.
“좋아해..”
그의 입술이 작게 벌려지고 그보다 조금은 크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가슴을 찔러왔다.
세상에. 좋아해. 좋아한다니. 그가? 그가 나를? 이라는 의문이 가슴속에서 미친듯이 파문들 일으켰다. 이명이 들리는 듯했다. 가볍게 현기증이 일어났다. 천미터를 전속력으로 달린 뒤의 그것처럼 심장소리가 들렸다. 심장소리와 이명이 뒤섞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내 표정을 읽을 수 는 없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은 단 한번도 없으리라 자신한다. 그렇게 내가 급격히 패닉에 빠져들 무렵 그가 몸을 뒤로 물렸다. 좀더 가까이 다가오리라 믿었던 그가 서서히 물러섬에 나는 왠지 알 수 없는 배신감마저 느겼다. 그의 표정은 씁쓸히 굳어갔다. 미소가 아닌 미소지만 억지 눌러 만든 찰흑상 같은 표정. 손목이 힘없이 까닥까닥 거렸다. 손을 흔들며 아까와 마찬가지로 조금은 갈라진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마렴. 이미 다 지난 이야기인걸. 이제 와서 내 지난 감정에 너를 곤혹스럽게 할 생각은 없다. 그거 정리하러 2년 외국도 돌아다녔고. 그렇게 해서 정리가 안되었다면 지난 내 2년을 별 쓸모없이 버린 것 같잖니. 진작 마음은 정리되었고 지금은 만나는 사람도 있어. 2년 동안 나를 기다려준 사람이야. 바보같은 사람이지? 진짜 바보인 나를 2년이나 기다리다니. 그런 바보같은 점에 마음이 움직이더라. 한번 움직이니 빠져드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러니 부담가지지마. 그 이야기하러 온거야. 실은 오늘 말이야. ”
아.. 깜깜하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공황상태의 극에 다다르던 나의 머릿속에 삽시간에 검은 페인트오 도배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아니 그렇게 되고나니 오히려 생각은 명쾌해졌다. 아, 그렇구나. 나는 몰랐었고 놓쳐버린 거구나. 저미는 가슴과는 다르게 표정은 온화해졌다. 그런 나를 보며 그의 표정도 스르륵 풀려 웃었다. 그렇구나. 저련 표정이었구나. 왜 나는 그렇게 웃어주는 그를 보면서도 단 한번도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아니 이성으로 사랑한다고 알아채지 못했을까? 난 그렇게도 어리석었었구나. 그가 나를 좋아했었다는 것은 몰랐었다 할지라도, 나도 그를 좋아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었다니. 나는 정말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구나. 가슴은 정정 땅으로 나락으로 어둠으로 뭍어져 가는데 나는 계속해서 온화했다. 그가 그의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에도 나는 그냥 웃어버렸고, 그가 나를 좋아했기 했던 여러 추억들을 공유하면서도 깔깔 거리며 웃었다. 가슴은 마냥 무너지는데 나는 그렇게 웃었다. 어른은 참으로 어려운거구나를 새삼 깨달았다. 아니 어른이어서가 아니라 나는 끝까지 어리석은 거였구나. 내가 흘리는 웃음과 그가 짓는 미소가 나를 향한 비웃음 같이 느껴졌다. 가슴이 아팠다.
“그럼, 잘지내렴, 앞으론 이전처럼 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우린 좋은 친구야. 그렇지? ”
꼬인 목소리로 그가 내게 건넨 마지막 목소리. 그는 여전히 앉은뱅이 술꾼이었다. 킬킬 거리면서 즐겼던 아니 슬펐던 술자리에서 일어날 때 그는 이전처럼 취해버렸다. 비틀거리는 그의 몸을 부축하고 택시를 태워 보낼 때. 그 와중에도 자신이 마중해야한다며 바득 거리는 그를 밀쳐 택시를 태울 때. 그는 여전히 지독히도 앉은뱅이 술꾼이었다. 그 사실만이 나를 작게나마 진심으로 웃게 해줄 수 있는 힘의 조각이었다.
떠나가는 택시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작은 점마저 사라지고서야, 여전히 흔들고 있는 나의 손등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가리는 눈물에 네온사인 불빛이 만화경의 그것처럼 분산되어 들어온다. 그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아, 그는 지독하게도 앉은뱅이 술꾼이었고, 나는 지독하게도 앉은뱅이 사랑을 했구나. 그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그를 사랑했던 그것은 분명 필연이었겠지만,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몰랐던 것은 운명이었겠구나. 아아- 그런 것이구나. 하아, 하는 비웃음이 새었다. 운명이라니! 그런 지독한 변명을 하다니!! 나는 그의 앞에서 비겁했고 나에게 비겁했고 끝까지 비겁하려 한 것이다. 아니다. 나는 지독하게 어리석게도 앉은뱅이 사랑을 했고, 그 결과 실연을 한 것이다. 그것도 나를 사랑했던 그보다도 뒤늦은 실연을..
앉은뱅이 술꾼.
그리고 앉은뱅이 사랑.